의대 증원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대통령실에서 총선 어젠다로 대표적인 기득권 전문직인 의사 때리기에 나섰고, 국민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국민들이야 대다수 기득권 의사들과 관련이 없으니(없다고 생각하니) 당연하다. 이런 류의 정책은 선거를 앞두고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의사들의 반발도 심상치 않다.
최근 전문의 수련을 받고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먹었다. 어찌 사느냐,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층적으로 물어볼 계획이었지만, 이미 사표 쓰고 쉬고 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이 친구야 이제 갓 태어난 딸도 있고, 모아둔 돈도 없으면서 괜찮겠어?", "몰라. 그렇다고 개돼지 취급받을 수는 없잖아."
친구에게 의료계 입장을 이것저것 들었다. 예상했던 대답도 있고 예상치 못했던 대답도 있었다.
먼저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우려다. 이미 개원가에서는 건강보험을 빼먹는 방식의 약간의 과잉진료가 공식처럼 잡혀있다. 변호사는 공급이 늘어나면 몸값을 낮추고 각자도생 할 테지만, 의료계는 이와는 조금 달라서 너도 나도 살아남기 위해 과잉진료 경쟁을 할 것이 뻔하다. 이는 건강보험 재정의 고갈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 의료민영화나 이에 준하는 어떤 차등 의료 서비스의 도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실제로 이렇게 되면 높은 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고소득층은 큰 타격이 없지만, 여태 건강보험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고 있는 저소득층이나 노년층에게 타격이 클 수 있다.
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수가 정책에 대한 지적이다. 의대 증원보다 수가 개선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늘 지적되어 왔다. 수가 책정 과정에서 의료계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도 않을뿐더러, 의료계 내에서도 항목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또 건보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려는 복지부 등 많은 것이 맞물려서 적정 수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리는 의료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시스템은 분명 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인원에 대한 교육 질 저하 문제, 의대 증원만으로는 지방의료나 필수의료 분야 살리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역시 언급됐다.
나는 사실 친구에게 묻기 전에 평생 기대소득의 감소가 제일 열받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만 해도 어려운 형편에 꾸역꾸역 공부해서 의사가 됐다. 그 노력에는 분명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대 정원이 2000명이나 늘어나면 소득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논리일지 몰라도,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의사 개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열받을만하다. 일종의 정책 신뢰보호에 대한 문제다. 나도 이 친구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며 이 점을 물었는데, 자기는 어차피 대학병원에서 계속 일할 생각이었던 터라 소득은 크게 상관없다고 한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대학병원 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다른 걸 차치하고 보면 의대생이 늘고 수련의가 늘면 나중에 너 입장에서 당직 설 후배직원들도 많아지고 어쨌든 좀 더 근무환경은 좋아지는 거 아냐?" 그건 그렇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점은 전혀 개선으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한다.
몇 가지 합리적인 지적과 몇 가지 의사 입장에서 그럴 수 있지 싶은 문제제기와 몇 가지 의외의 답변을 듣고 나니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건보재정이 걱정돼서 사표를 썼다고..? 겉으로 보면 조금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제일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것은 개원가 의사들이다. 그런데 1차 병원들은 파업 소식 없이 오늘도 잘 돌아가고 있다. 반대로 소득 면에서나, 근무환경 면에서나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은 전공의와 수련의, 그리고 이제는 교수들까지 사표를 쓴다고 한다. 왜 이럴까?
이를 이해하려면 한국 의료체계를 조금 더 다각도로 살펴봐야 한다. 사실 한국의 건강보험 시스템과 의료서비스 접근성은 세계 최상위 수준이다. 간단한 감기나 질병은 최저시급도 안 되는 가격에 치료받을 수 있다. (평소에 지불하는 건보료를 차치하면) 그리고 생명과 직결되지 않은 조금 불편한 수술도 빅5로 일컫어지는 최고의 의료기관에서 받을 수 있다. 너도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여태 가능했던 이유는 정부가 의사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신 의사들의 공급을 제한해 주는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무슨 희생을 하는데? 싶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개원가와 대학병원을 나누어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 살인적인 근무강도, 심지어 바이탈과는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스트레스를 견디며 일하고 있다. (수련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은 88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일해야 할 때는 아이디를 돌려 쓴다고 한다. 시스템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왜 이들은 이런 것을 견디며 일하고 있는가? 아마 개원가 논리에 따라 일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그리고 마음 한켠에는 견디다 견디다 정 힘들면 나가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안정망 심리 같은 게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자부심도, 안전망도 의사들의 공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여태 희생하고 있었다.
개원 전선에 있는 의사들은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다. 아마 의사 수가 늘어나면 각자의 방법으로 대처할 것이다. 과잉진료를 하거나,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을 찾아 진료와 시술을 하거나.
그런데,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다르다. 정부와 해 오던 암묵적인 거래가 깨졌다. 여태 강요받은 희생에 대해, 언젠가는 조금씩 나아지겠지 싶었겠으나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겠다. 친구가 말하는 "개돼지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개인이니 집단의 일방적 희생에 의해 시스템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선거를 앞둔 상황과 국민의 여론, 정부의 강경한 대응을 보니 이미 의대 증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참에 희생으로 유지되던 시스템에도 적절한 보상체계가 구현되어 국민에게 더 좋은 의료서비스가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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