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수로 유명한 이와하키 히토시의 만화 히스토리에서 주인공인 에우메네스가 승마를 배우면서 '등자'를 사용한다.
승마를 해보지 않아도 등자를 사용해서 말을 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 지 상상할 수 있다. 양 발을 지지할 수 있어서 말에서 손쉽게 일어날 수 있고, 말 위에서 체중을 실어 무기를 휘두를 수 있게 된다. 간단한 도구지만 기병부대가 전부 사용하면 그 위력은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승마를 가르쳐주는 스승은 등자가 편리한 것은 알겠으나 보조도구에 몸이 익숙해지면 나중에 등자 없이 승마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핀잔을 준다.
이것은 새로운 기술이 탄생할 때 기득권이 갖는 흔한 생각이다.
승마 선생은 이미 등자 없이 말을 잘 탈 수 있는 일종의 기득권자다. 등자를 통해 모두가 말을 편리하게 탄다면 그 기득권이 도전받게 된다. 또한 등자 없이 말을 잘 타는 것이 승마의 '근본적 기술'이라고 생각하며, 등자에 익숙해진 후 등자가 없어졌을 때의 불편한 상황을 걱정한다.
그런데 훗날 등자는 기병부대에 필수 장비가 됐고, 등자 없이 말을 타는 일은 상상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되었다. 승마 선생이 생각하는 '근본적 기술'은 대세이자 필수가 되어버린 '새로운 기술' 앞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은 기술이 되었다.
챗GPT의 등장으로 작업 환경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림, 영상, 문서작업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연산장비의 성능도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AI와 관련된 소프트웨어 발전이 하드웨어 발전을 이끌어내고, 하드웨어 발전이 소프트웨어 발전을 이끌어내는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5년 뒤, 10년뒤 어떤 기술이 등장하고 어떤 기술이 대세가 될지, 어떤 기술은 쓸모 없는 것이 될지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런 세상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기득권에 갇힌 생각은 모두 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챗GPT로 만들어낸 창작물이나 소설은 '근본 창작'이 아니라거나, AI를 활용해 그린 그림은 '근본 그림'이 아니라거나, 자동 통번역기를 사용한 외국어 의사소통은 외국어를 '근본적으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도 기득권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등자의 보급 이후 등자 없이 말을 타는 스킬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작업을 보조하는 다양한 AI 툴들이 대세가 되면 이 툴을 이용하지 않는 스킬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럼 그런 '근본 스킬'에 집착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떤 능력이 필요할지 미리 고민하고 이를 함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짜 '근본 스킬'은 이런 것이다.
먼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익히는 능력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AI를 활용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서 세상을 놀래킨다. 이 때 "우와 신기하다" 하며 감탄만 하고 있으면 그 기술들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보다 정확히는 타인의 생산성은 올라가고 나의 생산성은 떨어지니 나에게 해가 되는 기술일 수 있다. 당장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도 항상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업무가 자동화되었지만, 세상은 인간을 놀게만 두지 않았다. 향상된 기술에 걸맞는 향상된 생산성을 요구했고, 인간은 계속 공부하고 일해야 했다. 아마 AI 기술의 발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AI 툴을 활용하며 업무를 하는 것이 당연시 되면, 그에 걸맞는 생산성이 요구될 테고 오히려 더욱 광범위한 업무를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중노동에 시달릴 수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빠르게 적응한 자들이 살아남게 되더라.
또 중요한 것은, 특정 분야에서 AI가 따라할 수 없는 디테일이 있는 것이다. 코딩이든, 그림이든, 영상이든, 창작이든 어떤 분야든 AI 툴을 활용하여 많은 밑그림을 아주 손쉽게 그려낼 수 있지만, 진짜 장인만 해낼 수 있는 디테일한 영역은 결국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는 그 디테일의 가치가 더욱 빛날 것이다. 손쉽게 생산된 많은 밑그림들을 효과적으로 엮는 능력, 그리고 아주 높은 수준으로 완성시키는 능력도 반드시 가져야 할 '근본 스킬'일 것이다.
내가 가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도록 늘 노력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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