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를 여행할 때 한인타운에서 유명한 BCD 순두부를 먹으러 갔다. LA에서 시작해서 한국으로 역수입된 LA 한인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한식집이다.
조금 이른 저녁 시간에 갔는데도 대기시간이 1시간 가까이 되었다.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비까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천막을 쳐 두고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다. 순번을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 풍경이 새삼 흥미로웠다. 30~40명의 대기 인원 중 90%가 한국인이었다. 미국 여행 중이 맞나 잠깐 착각이 들 정도.
한국인 친구와 같이 오지 않고 백인이나 흑인끼리 온 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닥다닥 붙어서 기다리다 보니 몇몇의 대화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국말로 대화하는 팀. 영어로 대화하는 팀. 외모는 모두 한인이지만 사는 사용하는 언어는 제각각이었다. 영어로 대화를 하더라도 어떤 중장년 팀은 강한 아시안 악센트(혹은 한국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며 대화를 하는 반면, 어떤 젊은 친구들은 외모만 가리고 보면 백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미국식 영어를 구사했다. 아마 여기서 나고 자란 교포 그룹이 아닐까 생각됐다.
많은 한국인들이 혹은 한국인 부모들이 바라는 모습이 저렇게 영어를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습이겠지. 요새 젊은 친구들의 영어 구사 능력이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한국인에게 늘 영어는 최대 과제다. 그렇기에 영어 사교육 시장은 늘 호황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 영어 학습 스타트업이 성장하고 있다. 영어 학습에 대한 비효율이 늘 존재한다는 의미다.
저 교포로 보이는 (교포라고 생각될 만큼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인 친구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들은 바일링구얼(bilingual)일까. 저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어느 정도 일까.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미국인으로 살아가길 선택한다면 한국어 능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소수(minor) 인종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저들이 그것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을까? 저들이 한국에서 살기를 선택한다면 그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조카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라고 있어서 조카 생각도 났다. 형과 형수는 조카가 어느 정도의 한국인 정체성을 갖기를 바랄까? 한국말을 가르치고 한국어로 독서를 시킬까? 아니면 완전한 미국인으로 미국사회에서 경쟁하고 살아남기를 바랄까? 어떤 방향을 선택해도 어느 정도 불완전한 선택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유창한 발음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로 쓰인 텍스트를 독해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타인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은 대부분 한국말로 읽고 쓸 줄 알지만, 사회 각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그 이상의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언어의 공부는 끝이 없다. 그게 심지어 모국어라도 말이다. 나도 늘 책과 신문은 읽고, 글을 쓰고, 말을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만 수십 년을 살았어도 늘 부족한 느낌이다.
외국어의 영역도 이런 기준으로 바라보면 정말 어려워진다. 업무나 비즈니스 영역에서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 외국어로 내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까. 바일링구얼을 이런 영역까지 바라보면 사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고, 그저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하는 분야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가끔 바일링구얼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사례도 있다. 비정상회담과 문제적남자에 나온 미국인 타일러 라쉬는 한국인만큼 한국말 구사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마크 테토가 한국어로 쓴 글은, 정말 한국인 작가라고 해도 될 만큼 글이 좋다. 이들은 어릴 때 한국어를 접해서 배웠다기보다는 모국어인 영어로 꽤나 높은 단계까지 공부를 마치고 나중에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또 내 가까운 친구는 정말 바일링구얼에 근접해 있다. 이 친구는 한국어 책, 영어 책을 거의 차이 없이 편하게 읽고 지식을 습득한다. 또한, 한국어로 전문직 자격증을 딸만큼 공부했으며, 늘 영어로 비즈니스를 한다. 이 친구도 어릴 때부터 많은 독서를 통해 기른 뛰어난 한국어 사고능력을 바탕으로 외국어를 더한 느낌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외국어 학습을 좋아해서 영어에 계속 스스로를 노출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대단하다.
결국 듣고 말하는 기본적인 언어 습득은, 어릴 때의 노출로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선 모국어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국어를 통해 연습한 높은 사고능력에 더해 외국어를 익혀야 한다. 또 내가 높은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려면 그 수준을 목표로 하고 계속 익히고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만 쓰면 다른 언어는 조금씩 무뎌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여러 언어의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언어 구사라는 것은 일종의 운동 같다. 어떤 운동이든 한창 열심히 할 때 잘 되던 동작도 오랜만에 하면 어색하다. 반짝 공부해서 언어를 마스터한다거나 바일링구얼이 된다는 오만한 생각은 말고, 평생 한국어와 영어를 습관처럼 익히고 단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임드랍은 아이폰 끼리만 되는거 아니야? (0) | 2024.03.24 |
---|---|
사막 위의 플랫폼 - 라스베이거스 (0) | 2024.02.25 |
실리콘밸리 여행과 커피챗 (0) | 2024.02.11 |
20230913 Data science 대학원 진학 계획 (0) | 2023.09.13 |
KT 프리미엄 인터넷 가입 실패 후기 (1) | 2023.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