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 '군주론'을 읽었다.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피셋 지문에서, 또는 다른 책이나 칼럼에서 '군주론'이 소개되고 인용되는 것은 많이 봤었다. 또 마키아벨리즘으로 표현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통찰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읽어야지' 하며 미루고 있다가 서점 가판대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골라서 집어 왔다. 여러 버전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었으나, 해설이 가장 충실하게 달린 것으로 판단되는 것(최현주 옮김, 김상근 감수, 출판사 페이지2북스)을 집었다. 결과적으로 굉장히 잘 한 선택인 듯.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 책을 이렇게 깔끔하게 번역하고 자세하게 해설을 달아놓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군주론은 1500년대에 쓰인 책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번역이 되어 문장의 해석이 충실히 되어 있다. 그 덕인지, 당시 상황을 모르면 어떤 의미를 표현하는지 모르는 단어들에는 각주가 자세히 달려 있고, 목적어나 주어가 생략된 경우에도 명확한 이해를 위해 괄호 안에 그 의미를 다시 써 주는 경우가 많다. 또 여러 번, 여러 버전으로 번역되어서 발전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번역도 깔끔했다.
가끔 인류의 지성을 진 일보 시킨 고전들을 볼 때, 한국어 번역이 엉망이어서 곤란했던 경험이 있다. 다른 책들도 이런 번역과 해설이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챗GPT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군주론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통치방식, 성공한 군주가 되기 위한 방법,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기 위한 방법 등 통치론을 설명한 책이다. 현대 사회에서 왕이 있는 나라는 많지 않지만, 그 형태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또는 사기업의 대표이든, 혹은 어떤 조직의 팀장이든 상관이 없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특히 일정 형태의 권력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통찰을 준다.
그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권력을 포기하지 말아라. 나의 생사여탈권을 절대 남에게 주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라" 둘째, "타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이 두 가지 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로써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 도출된다. 이는 항상 또는 거의 예외 없이 성립되는 일관된 법칙이다. 타인에게 권력을 쥐여준 자는 스스로 몰락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있거나 계략을 가진 자만이 타인에게 권력을 쥐여줄 수 있는데, 막상 권력을 쥐게 된 자는 힘이나 계략을 가진 자 모두를 경계하게 되기 때문이다."(3장)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사람들이 [군주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군주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에 기초해야 한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미움은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7장)
나의 조직 생활을 돌이켜 보면, 일을 제대로 완수한다는 목적함수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적함수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완성도 있는 업무 성과를 내려면 직원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때로는 직원들을 닦달하고 혼내야 한다. 그러나 또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가 좀 더 열심히, 내가 조금 더 많이 일하는 방법을 택하고, 직원에게는 늘 친절하려고 했다. 어느 정도 업무량 까지는 이 방법이 먹혔지만, 때로는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다. 일을 일 답게 하려면 조금 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뒤에 숨은 비겁자였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을 파악하는 훌륭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 통찰은 시대를 관통하여 적용되기 때문에, 군주론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읽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그는 이런 통찰을 가지게 되었을까? 피렌체의 관료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도 중요했겠지만, 아마 역사에 대한 풍부한 공부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집필 직전의 국가 흥망성쇠를 설명하고 여러 예시로 활용한다. 전쟁을 하고, 국가가 세워지고, 권력을 읽고, 다시 망하고, 그 과정과 인과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또 여러 사례들을 보다 보면 어떤 공통된 인간의 행동 양태들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이를 파악하고 이용해야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다.
1500년대에도 과거의 역사가 중요했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사실 500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다.) 과거 역사로부터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혹은 때로는 그 통찰을 잘 정리해 놓은 군주론 같은 책을 읽는 것도 방법이다. 역사와 고전에 많은 배움이 있다.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제2 서기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관료로서는 가장 성공한 축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교황청과의 싸움으로 피렌체의 정세가 변하고, 피렌체를 메디지 가문이 다스리게 되면서, 파면은 물론 반란 음모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까지 당하고 귀향을 가게 된다. 여기서 쓰인 책이 군주론이다. 메디치 가문에게,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인재인지 설득하고, 당신이 훌륭한 군주가 되려면 나 같은 사람을 곁에 두고 써야 한다고 적극 어필하는 책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복권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그는 '군주론'이라는 500년이 지나도 읽히는 저서와 이름을 남겼다. 그가 단순히 관료로서 말년까지 승승장구했다면, 역사에 이렇게까지 기억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무엇이 더 행복한지, 특히 마키아벨리에게 행복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위기와 좌절이 닥쳐와도, 뭐라도 하면 어떻게든 더 나은 방향으로 풀릴 수도 있음은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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