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게으른 편이었던 것 같다. "귀찮다"라는 말을 너무 자주 써서 어머니께 혼난 적도 많았다. 중학교 때는 수업시간 내내 졸아서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귀찮은데"라고 말했다가 흠씬 맞기도 했다.(그때는 그렇게 때려도 되는 시절이었다.)
반복적으로 연습해서 깊은 내공을 쌓아야 하는 일은 싫었다. 그나마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잔머리는 조금 돌아가서 어떤 일이든 빠르게 배우고 약간의 성과만 내면 금방 질려했다. 그 이상을 쌓으려면 진득한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공부에 있어서도 성실함 보다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방법만 찾았고, 그저 그 정도 했던 것 같다.
취미생활도 마찬가지다. 게임도 어릴 때는 곧잘 배워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는 친구들보다 늘 잘했지만, 중학교 즈음부터 진득하게 한 게임(스타)을 오래 한 친구들은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물론 이제는 새로운 게임은 시도도 못 하고, 하던 게임도 잘 못 하는 지경이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운동도, 컴퓨터도, 게임도, 다른 무엇도 어느 정도 기본은 빨리 배우지만, 진득하게 오래 파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주식투자를 처음 접할 때도 그랬다. 그래도 공부해서 밥 벌어먹고사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주식투자도 공부하면 못 할 게 뭐야 하고 이것저것 책을 읽고 공부했다. 워렌버핏이니 피터린치니 가치투자니.. "다 좋은데.. 나는 못 할 것 같은데, 매번 이렇게 기업을 공부해야 한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접하게 된 마법공식(조엘 그린블란트의 '주식시장을 이기는 작은 책')과 문병로 교수의 '메트릭 스튜디오'에서 답을 봤다. "나 같이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룰 베이스로 자동으로 투자하게 만들어 놔야 해. 심지어 매매도 직접 하기 싫다. 모든 것을 자동화해보자."
처음에는 재무제표를 이용한 퀀트 투자(혹은 스크리닝 투자)를 해보기도 했다. 웃긴 점은 이 때도 몇 달에 한 번 엑셀을 돌리고 몇 달에 한번 사고파는 것이 귀찮아서 이런 것까지 자동화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코스피지수는 잘 나가는데 내가 선별한 종목들만 빌빌거리는 길고 긴 Drawdown 기간을 몇 번 거치면서, 무엇이 더 좋을까 하고 파고 파다 보니 한국-주식-현물-데이트레이딩(low-frequency)-알고리즘-자동매매까지 오게 됐다. 종목을 분석하는 공부도 하기 싫고, 가격 등락과 시장 상황을 매일 관찰하며 반응하기도 귀찮고, 매매일지를 쓰고 매일 복기할 수도 없는, 게으른 나에게 딱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과정은 결코 게으를 수 없었다. 이만하면 되겠지? 싶은 어설프게 분석하고 어설프게 돌린 전략은 잠깐 수익을 주는 척하다가 계속 손실로 전환됐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좌절을 맛본 다음에서야 어릴 때 읽은 동화 '아기돼지 삼 형제'의 막내돼지가 지었던 벽돌집을 떠올리게 됐다. 당장 전략을 생성하고 돌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초가집과 나무집은 다 부서졌다. 하나를 돌리더라도 제대로 분석하고 끝까지 판 다음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벽돌집 1호라 명명한 전략이 조금씩 수익을 내줬다. 그렇게 하나 둘 전략을 만들어 갔다. 늘 부족한 느낌이다. 전략 두세 개 있을 때는 다섯 개 전략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20개가 돌아가도 불안할 것 같다. 시장도 한국 주식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방베팅이 가능한 파생상품과, 성질이 다른 가상화폐까지 확장하려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전략을 분석하고 확정하는 과정도 엄청난 귀찮음이다. 책이나 강의나 유튜브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어떤 변수를 선택할지 정하고, 분석한 결과를 관찰하고, 어느 변수를 추가하고 어느 변수를 버릴지 판단하고, 다시 분석을 돌리고, 수익과 안정성의 여러 결과들 중 선택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이 귀찮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요즈음은 전략 생성 자체를 자동화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아직은 데이터만 가지고 제로에서 전략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엄두가 안 나지만, 아이디어를 입력하면 변수 선택, 분석, 최적화 까지는 한 번에 하려고 한다. 나름의 방법으로 계속 연구 중이다. 나중에는 결국 아이디어 없이도 전략을 만들어내고, 판단과 구동까지도 다 자동화하고 싶다. 이때는 팀이 필요하겠지.
이전과 같이 늘 그랬듯 딱 필요한 만큼만 노력하고 싶었고, 딱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익히고, 금방 손을 털고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사실 아직도 그러고 있을 수도 있다. 근데 이놈의 자동매매라는 게 생각 같지 않더라. 아직도 나는 필요한 만큼만 노력하고 있는데, 어느새인가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교류하던 주식&개발 공부모임에서 오고 간 대화가 늘 기억에 남는다. 어떤 분이 말했다. "1시간씩 10일에 걸쳐해야 하는 일을 1시간을 투자해 자동화하면 개발 적성이 있는 거라고 하네요." 그러자 이미 개발자로서 수십 억을 벌어 엑싯하시고, 이제는 투자자 활동하는 모 분이 "나는 10시간 걸쳐서 해야 하는 일을 10시간에 걸쳐 자동화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화 실력이 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끔 나는 10시간 걸릴 일을 20시간씩 자동화에 쏟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반복적인 일 10시간보다는 새로운 일 20시간이 더 재미있다. 그리고 그게 언젠가는 장기적으로 나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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